행복한 세상/세상읽기

눈물로 보낸 52일, 다시는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킹스텔라 2014. 6. 7.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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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15일, 제주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아들은 들떠 있었다. 기타 연주를 하겠다고 수학여행 며칠 전부터 틈만 나면 연습을 해댔다. "슈퍼스타K 나가는 거 같지 않아?" 여행가기 전 새 옷도 샀다. 이모는 조카에게 기타를 선물했다. 그게 단원고 2학년 안주현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환한 웃음만 가족들 가슴에 새겨놓고 아이는 천국으로 떠났다.

  6일로 세월호 참사 52일째. "이제 지겹다" "그만 울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유가족들에게 슬픔은 현재진행형이다. 경향신문은 이틀에 걸쳐 안군의 어머니 김모씨(44)와 안군 이모(41)의 52일, 7주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세월호 참사에서 희생된 안산 단원고 2학년 안주현군의 어머니 김모씨가 6일 경기 안산시 화랑유원지 내

 합동분향소에서 아들의 영정을 바라보고 있다.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 그날 4월16~18일
생존자 명단에 없었지만 수영 잘해 '한가닥 희망'


  16일 아침,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뉴스를 봤다. 어머니 김씨는 아들이 탄 배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여동생인 주현이 이모가 울며 전화를 걸어왔다.

"저 배가 주현이가 타고 있는 배잖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단원고에 전화를 걸었다. "학생들 모두 구명조끼를 입었고 구조를 기다리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현이는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남편(49)과 학교로 달려갔다. 이미 실신하거나 소리치는 학부모들로 난장판이었다. 낮 12시 단체버스를 타고 진도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생존자 명단을 여러 번 불렀다. '안주현' 석 자는 들리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밥 먹고 돌아서면 배고프다고 하던 아이였어요. 배 안에서 얼마나 배가 고플까, 하는 생각뿐이었죠."

  오후 5시30분. 진도 체육관에 도착해 생존자 명단을 확인했지만 주현이 이름은 없었다. 다른 부모들과 팽목항으로 갔다. 주현이네 8반에서는 첫날 구조된 2명이 전부였다.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해경선들이 빙빙 돌기만 할 뿐 하고 있다던 구조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학부모들은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남편은 아내가 쓰러질까봐 현장에 가지 못하게 했다.

"구조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말을 믿었고, 주현이가 수영도 잘해서 다른 아이들이 시신으로 올라올 때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거든요."

  주현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16일은 주현이 동생(13)이 수련회를 가는 날이었다. 도시락을 싸느라 15일 저녁부터 바빴다. 인천항으로 버스가 출발하기 전 실내화를 챙겨가지 않은 게 신경쓰여 "실내화 안 챙겨가도 돼"라고 전화로 물으니 "친구들 거 빌려 신을게"라고 말한 게 마지막 통화였다. 오후 9시20분쯤 이모와 배에서 마지막 통화를 했다. 목소리가 지쳐 있었다고 했다. 이모는 "비행기 타고 가고 싶어했는데 친구들과 함께 가려고 배를 탔던 건데…"라며 흐느꼈다.


■ '시신이라도…' 4월19~28일
시신이라도 찾길 바랐지만 해경은 수습 대책도 없어


  19일 오후부터 내 아이가 살아있을 거란 기대가 사라지고 있었다. 희생자들의 시신이 20~30구씩 인양되던 시기, 김씨는 팽목항에 차려진 임시 시신안치소를 찾았다. 다른 아이들의 시신을 수도 없이 봤다. 먹지 않고 자지 못한 채 약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래도 팽목항을 떠나지 않았다.

  가족들은 "사고 후 생존 가능성이 있던 3일 동안 도대체 뭘 한 거냐"고 따졌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시신 수습 대책을 물었지만 아무도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분노한 가족들과 함께 남편은 20일 새벽 진도 체육관에서 청와대로 가려다 경찰에 막혔다.

  24일, 주현이가 배가 이미 심하게 기운 상황에서도 기타를 손에서 놓지 않은 모습을 다른 희생자 학생 휴대전화 사진을 통해 확인했다. 한 손은 벽에 대고, 한 손은 기타를 쥐고 있었다. 해경은 "조류가 강해 작업을 못한다"고 했지만 많은 시신이 올라왔다. 실종자 가족들은 이날 밤 해경 책임자들의 멱살을 잡고 격하게 항의했다.

   김씨는 27일 안산 집에 여동생과 함께 올라왔다. 평소 생활하던 것처럼 해두면 아이를 찾을 수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방방마다 불을 켜고 가스밸브도 열어뒀다. 간식도 식탁에 평소처럼 올려뒀다. 28일 진도로 다시 내려갔다. 남편은 28일 팽목항에 주현이가 좋아하던 콜라를 가져다뒀다. "꼭 올라와라, 아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안주현군은 수학여행 중 친구들 앞에서 기타 공연을 하려고 했다. 

그래서 틈틈이 연습도 많이 했다. 씨엔블루와 오디션스타 정준영을 좋아했다고 한다. 

| 고 안주현군 어머니 제공


■ '와줘서 고맙다' 4월29일~5월4일
기적처럼 올라온 아이… 퉁퉁 불은 몸 차마 못 만져


  29일 오후 2시쯤 기적처럼 주현이가 올라왔다. 팽목항에서 아들을 확인했다. 빨갛던 왼뺨을 제외하고는 깨끗한 모습이었다. 엄마아빠 찾기 쉬우라고 양 주머니에 이모가 준 5만원과 학생증이 든 지갑, 그리고 휴대전화를 꼭 넣은 채 올라왔다. 김씨는 아들의 마지막 촉감을 느끼고 싶었지만 퉁퉁 불은 아이의 손과 발을 차마 만질 수가 없었다.

원래 이날은 작업을 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수면이 잔잔했다. 정조시간이 길었다. 김씨는 "나중에 잠수사들에게 물어도 그날 왜 정조시간이 예상보다 길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더라"며 "주현이가 엄마아빠를 빨리 보고 싶었나 보다"라고 말했다.

주현이는 8반 아이들이 머물던 4층 선수 쪽이 아닌 5층 로비에서 다른 친구 2명과 함께 발견됐다.

"얼마나 살려고 발버둥쳤으면 5층까지 올라왔겠어요."

  실종자 가족들 사이에서는 시신만 찾아도 '로또 맞은 것'이라는 소리가 돌았다. 다음날 오후 1시 DNA 검사를 마치고 집 근처 안산 한도병원으로 올라왔다. 바로 맞은편에도, 옆에도 주현이 친구들의 빈소가 차려졌다. 주현이 친구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찾아왔다.

  5월1일 입관 때 남편은 김씨가 아들 얼굴 보는 걸 기어코 막았다. 하루가 다르게 부패하는 시신을 보고 아내가 받을 충격 때문이었다. 다음날 용인에서 아들을 화장하고 평택 서호추모공원에 안치했다. 왜 먼 곳에? 김씨는 "주현이가 평소 깨끗한 걸 좋아해서 가장 새로 지었다는 곳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 '잊어야 하는데…' 5월5~29일
아들 휴대폰 복원 못해 실망… 장례 후 다른 유족들 곁에


  장례를 치르고 매일 김씨는 다른 유족들이 모여 있는 안산 정부 합동분향소에 나왔다. 너무 우울해서 자칫 다른 맘을 먹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김씨는 "같은 처지의 부모들끼리 모여 대화를 나누면 그나마 우울한 생각이 덜 든다"고 말했다. 5일부터 분향소에서 유족들이 받기 시작한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운동에도 적극 나섰다. 김씨는 분향소 출구에서 울먹이며 "아이들 억울함 좀 풀어주세요"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김씨는 "고등학생들이 지나갈 때마다 그냥 눈물이 계속 난다"면서 "학생들이 단체로 분향소에 조문 오면 다른 학부모들과 함께 서명을 받다 말고 얼싸안고 울었다"고 말했다. 주현이 이모도 "학생들을 보면 '우리 주현이가 더 예쁜데'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며 "40살 넘게 결혼도 하지 않고 내 자식처럼 여겼는데 살 이유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10일에는 주현이의 휴대전화를 돌려받았다. 4월29일 수사를 위해 필요하다고 해서 제출했는데 해경으로부터 열흘이 넘어서야 받은 것이다. 복원을 맡겨봤지만 실패했다. 김씨는 크게 실망했다. 그는 "해경에서 혹시 불리한 내용이 나와 삭제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며 "진상규명을 통해 반드시 밝혀져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남편은 5월 중순부터 다시 일했다. 그러다가 남편과 함께 27일 찾은 국회에서 김씨는 또 한번 크게 실망했다. 가족들과 국정조사계획서가 본회의에서 통과되는 모습을 지켜보려 했지만 가족들이 2박3일 동안 국회에서 머물며 압박하고 나서야 겨우 통과됐다. 김씨는 실망해 첫날 밤 안산으로 돌아왔다. 그는 "애들이 그렇게 억울하게 죽었는데 가족들을 앞에 두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게 말이 되느냐"며 원통해했다.

  김씨는 원래 부동산 분양 관련 일을 해오다 사고 이후로 일을 아예 접었다. 도저히 사람들을 멀쩡히 웃으며 만날 수가 없어서다. 또 하나 이유는 일하느라 아들에게 잘 못해준 것만 생각나기 때문이다.

"일한다고 여행도 같이 못 다니고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밥도 차려주지 못했어요. 주현이가 오히려 밥을 차려주려 하면 '엄마 피곤한데 그냥 자'라고 말했죠."

  주현이는 4살 터울 남동생을 끔찍이 아꼈다. 동생이 친구들과 다투면 해결사 역할을 했다. 하지만 동생은 형이 2주 동안 보이지 않다가 숨진 채 돌아오자 장례식장에서 머리를 벽에 박는 등 이상행동을 보였다. 김씨는 그래서 둘째를 혼자 두지 못한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서야 분향소에 나왔다가 귀가할 때 맞춰 집으로 돌아간다. 일을 보러 집을 나올 때도 꼭 둘째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함께 놀게 한다. 형과 한방을 쓰던 동생은 형 생각 때문에 방에서 자지 못하고 거실에 나와 쇼파에서 잔다. 김씨도 1~2시간밖에 자지 못한다. 김씨는 얼마 전 고대안산병원에서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그는 "약으로 연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아들 방을 매일 깨끗이 청소하며 그대로 두고 있다. 손재주가 많아 좋아했던 프라모델, 교과서, 자동차 사진을 스크랩해둔 신문 등을 남편은 얼른 빼자고 하지만 49재가 끝나는 다음달 1일까지는 도저히 치울 수가 없어 그냥 둘 생각이다.


고 안주현군의 공부방 모습. 

손재주가 좋았던 안군의 책상 위에 프라모델 조립품이 놓여 있고, 평소 자동차에 관심이 많아 

자동차 관련 신문기사를 스크랩해 놓은 것이 보인다. | 고 안주현군 어머니 제공


■ '꿈 이뤄줘야죠' 5월30일~6월6일
아들에 대학 명예합격증 주고 억울한 죽음 풀고 싶을 뿐


  김씨는 매주 화요일 강원 횡성군 둔내면 사찰에 둔 주현이 영정을 보러 혼자 간다. 주현이가 꿈속에서 먹고 싶다던 고깃국, 라면, 빵 등 뭐든 들고 간다. 평소 옷이 지저분하면 참지 못했던 주현이를 위해 새로 산 옷을 가져다 놓기도 했다. 방에 있던 연습용 기타도 가져다 놓았다. 절에 가면 아들 사진을 안아주며 "잘 있었어? 먹고 싶은 거 없어? 엄마가 생전에 주현이한테 못해줬으니까 편한 데 가서 편하게 하고 싶은 거 하고 있어"라고 말한다. 주현이가 좋아했던 씨엔블루와 정준영의 사인을 받은 CD를 각각 평택 서호추모공원 유골함과 안산 합동분향소 영정 앞에 가져다 놨다.

  김씨는 "아직은 아무 삶의 계획이 없다"면서 "아이의 억울한 죽음을 풀고 싶은 생각뿐이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게 많은데 국조특위에서 하는 척만 하지 말고 제대로 조사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100일, 1000일이 지나더라도 진상규명을 위해 서명운동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도대체 전원 구조했다는 말이 왜 나왔고 왜 초반에 구조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지 꼭 밝혀야죠." 7일에도 김씨는 서울 거리에서 직접 서명운동에 나설 계획이다.

  손재주가 뛰어났던 주현이는 자동차 모형을 설명서 없이 혼자서 조립할 정도였다. 나중에 자동차를 다루고 싶어해 안산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미래자동차공학과에 꼭 가고 싶어했고 내년 말 합격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었다. 김씨는 어려운 부탁이 있다고 했다. "대학 명예합격증을 받아 아들에게 가져다 주고 싶은데…."


이 글은 2014. 6. 7 (토) 경향신문에 기재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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