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의 좁디좁은 골목에서 150명이 넘는 소중한 생명이 허망한 죽음을 맞은 다음날 아침. 국민의 안전을 총책임지고 있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말은 귀를 의심케 했다.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었다. 경찰이나 소방인력을 미리 배치해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 당장 머리 숙여 사죄를 해도 모자랄 판에 희생자들과 유족, 국민들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책임 회피였다. 정부는 5일까지를 ‘국가애도기간’으로 정해 정쟁을 멈추자고 하면서 이번 참사를 ‘사고’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표기하는 지침을 내놓았다. 참사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하기보다 자신들에게 미칠 후폭풍을 막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김준기 뉴스콘텐츠 부문장
정부는 참사를 막지 못한 제도적 한계도 주장하고 나섰다. 행안부의 ‘지역축제장 안전관리 매뉴얼’이 주최자가 있는 축제에만 적용되는 것이어서, 주최자 없는 핼러윈 행사에 행정당국과 경찰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매뉴얼보다 상위에 있는 재난안전법 제4조 1항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재난이나 각종 사고로부터 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을 보호할 책무를 지고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헌법(제34조 6항)은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국민들의 안전에 대한 정부의 무한 책임을 규정한다.
정부의 태도에 비판이 쏟아졌다. 매뉴얼에 없는 위험 상황에 놓인 시민들은 방관해도 된다는 것인가, 주최자가 없는 행사일수록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 안전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다. 여당의 유승민 전 의원도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위험할 정도로 인파가 몰릴 것을 미리 예상하고 정부는 사전에 대비했어야 한다”며 이 장관을 파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8년 전 세월호 참사 구조와 수습 과정에서 박근혜 정부는 “이게 나라냐”는 비판을 받았다. 윤석열 정부는 이번 참사에서 국가와 정부의 존재 이유에 대한 엄중한 물음에 직면하고 있다. 참사가 벌어지던 시간 경찰과 행안부, 대통령실은 정부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참사 발생 4시간 전부터 112에 ‘압사’ 위험 신고가 있었지만 경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참사 발생 보고는 대통령, 행안부 장관, 서울경찰청장, 경찰청장 순으로 이뤄졌다. 정상적인 정부 기능이 작동했다면 서울경찰청장, 경찰청장, 행안부 장관, 대통령으로 보고 체계가 이어져야 했다.
윤석열 정부가 이번 참사에서 책임을 최소화하기 위해 애쓰는 데는 지난 세월호 참사 때처럼 몰아칠지 모를 시민사회로부터의 비판이 두려워서일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작은 정부와 민간 자율의 추구라는 현 정부의 핵심 국정기조도 어른거린다. 민간이 자율적으로 하는 행사에 정부는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작은 정부론은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을 계기로 미국, 영국 등을 비롯해 전 세계 보수정권의 숭배 대상이 됐다. 그 뿌리는 윤석열 대통령이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여러 차례 언급한 자유지상주의 경제학계의 태두 밀턴 프리드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부의 개입 없는 자유경쟁시장이 가장 효율적이라며 노동자 보호나 사회보장, 심지어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규제도 자유의 적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런 가치관 속에서 정부의 존재 이유는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정부는 국민을 이번 참사와 같은 사고로부터의 안전뿐 아니라 노동현장에서의 안전, 재난으로부터의 안전, 질병으로부터의 안전, 실업으로부터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다. 윤석열 정부에서 그런 조짐이 이미 보인다. 세금을 낮추고 재정을 긴축하며 중대재해법을 완화하고 건강보험 보장 범위를 축소하려는 움직임 등이 그것이다.
아브히지트 바네르지와 에스테르 뒤플로 부부는 빈곤 퇴치를 위한 좋은 정부 정책과 나쁜 정책의 효과를 실험적으로 입증한 연구로 2019년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개발경제학자들이다. 그들은 함께 쓴 저서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Good Economics for Hard Times)>에서 “정책은 강력하다. 정부는 엄청나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엄청나게 해악을 끼칠 힘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정부는 실패할 수도 있지만 자유를 억압하고 경제의 효율성을 망치는 악마는 아니다. 국민을 지키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물론 좋은 정부일 때의 얘기다.
경향신문 2022.11.4 <에디터의 창> 김준기 뉴스콘텐츠 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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