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세상/나의 글쓰기

요리하는 남자

킹스텔라 2024. 2. 11.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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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끔하고 싸한 느낌에 오른손에 쥔 칼을 반사적으로 놓았다. 왼손 약지 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봉긋하게 솟아오르며 흐른다. 한석봉의 어머니는 못되어도 자연스럽고 빠른 칼질을 원했지만, 생각만 앞섰나 보다. 평소 경험과 경륜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먹는 즐거움이 없다면 어떨까? 미각을 잃어버리고 오감을 통한 음식의 참맛을 모른다면 별로 살맛이 안 날 것이다. 텔레비전에서는 현란한 비주얼의 요리 프로그램이 앞다퉈 방송되고 그것을 보는 시청자들은 입맛을 다시며 한 번쯤 먹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만큼 사는 것이 풍요로워지면서 집밥도 풍성해지고 맛집을 찾아 전국 각지를 누비는 미식가들도 많아졌다. 자기만의 만족과 행복을 찾아 나서는 일상이 새로운 풍속도처럼 대세가 되었다.

요리하는 모습

 

  가정에서 보면 대다수 남자는 요리에 별 관심도 없고 하지도 않고 여자들이 하는 것으로 알았지만 이러한 관습 아닌 관습도 시대가 변하며 남자가 주방을 넘나들면서 많이 바뀌고 있다. 요리하는 모습을 보면 무척 재미있어 보인다. 여러 가지 재료가 하나씩 다듬어져 서로 조화롭게 결합하다 보면,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각기 다른 악기가 멋진 소리를 내어 아름다운 앙상블 화음을 이루듯 보기 좋고 맛있는 음식으로 탄생한다.

 

  먹는 것도 좋지만 직접 요리하는 재미를 모르고 살아온 남자들은 얼마나 불쌍한가? 나도 거기에 속하는 일인이라면 억울하지 않은가. 이러한 생각에 얼마 전 한 대학의 평생교육원 요리 교실에 등록하여 정식으로 요리를 배우게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참석했는데 의외로 수강생의 절반이 남성이고 그들의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시험 준비를 하는 수험생 표정과도 같았다.

 

  첫 시간으로 묵은지 소고기 말이오이소박이를 만들어 보았다. 머릿속에서는 다 되는데 몸의 움직임은 뜻대로 되질 않는다. 재료를 씻고 다듬고 배합하는 것은 그런대로 잘 되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 능숙한 칼질이다. 여인네의 평범해 보였던 칼질이 수십 년간 갈고 닦아온 생활 속의 비결이라 생각하니 불현듯이 존경스럽다 못해 위대하게 느껴졌다.

오이 소박이

 

  수강생들은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것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우고 시선을 집중하며 배운다. 요리를 하며 이것이 보기 좋고 맛있는 음식으로 탄생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과 이 음식을 먹어 줄 사람이 얼마만큼 맛있게 먹으며 좋아할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설렜다. 미숙하지만 선생님이 가르쳐 준 대로 정성껏 요리하니 비주얼도 좋고 맛있는 음식이 탄생했다.

오이소박이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라는 속담은 남의 처지가 나보다 더 좋아 보이는 사람들의 욕심쟁이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요리하면서 느낀 것은 내 떡이 제일 커 보인다.”였다. 내가 만든 요리에 사랑과 정성을 정말 많이 넣었나 보다. 요리하는 새로운 체험이 즐거움을 배가시켜 주며 일상적인 무미건조하고 고단한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인본주의 심리학자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중 가장 기본적인 첫 번째 단계인 생리적인 욕구가 충족되어야 점차 최상의 단계인 다섯 번째 자아실현의 욕구도 충족된다고 하였다. 요리한다는 것은 기본적 욕구인 음식을 맛있고 배부르게 먹는 즐거움과 최상의 욕구인 무엇인가를 해냈다는 만족감과 자신의 잠재력을 동시에 느끼게 하니 얼마나 좋은가. 이번 요리를 배우면서 한층 즐거움과 자신감, 뿌듯한 자존감이 더해졌다.

 

  오늘도 재충전이 필요하다면, 또 쫓기듯 살아온 지난 세월이 미안하다면 요리를 배워봄이 어떨까. 다시 찾은 여유, 새로운 즐거움, 최상의 자아실현 욕구가 요리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충족된다면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와 아이들의 평가가 어떻게 나올지를 생각하니 기대와 설렘에 마음이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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