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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성수필가 27

아빠 용돈

얼마 전, 퇴근하여 집에 들어서자 아들이 두툼한 흰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표지에는 ‘아빠 용돈’으로 시작하는 작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봉투 안에는 만 원짜리 수십 장이 들어있었다. ‘아빠야! 21년 동안 아들 키우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아들이 번 첫 돈이니까 맛난 거 사드세요. 앞으로 몇 년만 더 고생하시면 사회인이 되니까 몇 년만 더 길러 주세요.’라고 적혀있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처음으로 용돈을 받은 것이 고등학교 1학년 때이다. 중학교 시절까지는 집에서 생활하다 보니 특별히 용돈이 필요치 않아 그때그때 돈이 필요하면 부모님께 손을 벌렸었다. 하지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집에서 멀리 떨어진 타지에서 유학하며 자취를 하다 보니 매월 일정한 금액의 용돈이 필요했다. 이때 학생들의..

거울

이월순 동시집 「바보같은 암소」94페이지 아침마다 조회 시간이면내 눈 속에 들어와 온통 나를 사로잡는교무실 벽에 걸린 저 거울거울 속에 비쳐 일렁이는 저 배경들일렁일 때마다 비쳐지는 파아란 동산 세월이 간다는 말은 어른들로부터 들어왔지만나는 세월이 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어오직, 저 거울 속에서만이세월이 가는 것을 나는 보았어 거울 속에 비쳐진 배경들일렁일렁 일렁일렁아! 저렇게저렇게 세월이 가고 있네. 나도 어머니가 들여다보는 거울을 본다.어머니의 축축한 눈망울을 거울 삼아 세상을 보고 세월을 본다. 어머니가 바라본 세상과 세월, 그 시들을 통해 세상을 본다.세상은 놀이와 즐거움과 장난으로 가득하다.결혼을 하고서도 모르다가 딸아이를 낳고선 세상의 엉뚱함을 알았다. - 막내 아들 - 이월순 (시인,..

소롭길

이월순 동시집 「바보같은 암소」82페이지 책 보따리 마루에 팽개치고되돌아가는 풀밭 길풀포기 덧신 삼아엄마 찾아가는 길 풀 냄새 엄마 냄새어우러진 풀밭 소롭길 수건 두른 엄마 머리보일 듯 말 듯 다가오네엄마 엄마 우리 엄마! 이월순 (시인, 수필가, 1937. 11. - 2021.7.)- 1937년, 충북 보은에서 출생- 2000년, 세기문학 수필부문 신인문학상 수상- 2000년, 동서문학 시부문 맥심상 수상- 2001년, 월간문학세계 아동문학 동시부문 신인문학상 수상- 2012년, 장폴 샤를 에이마르 사르트르 동시집 부문 우수상- 2013년, 월간문학세계 아동문학 동시 본상 수상- 2014년, 대한기독문학상 수상- 1997년 '풀부채 향기' (시집)- 2000년 '내 손톱에 봉숭아 물' (시집, 삶과..

도랑

이월순 동시집 「바보같은 암소」56페이지 학교는 가야 되는데밤새 내린 비에 도랑 흙탕물 콸콸신발 한 짝 흙탕물에 빼앗기고어린 나로서는 도저히 건널 수가 없어 엉엉 울면서돌아서야만 했지. 아버지 손 잡고 다시 와 본 도랑물내 신발 한 짝 먹고도 미안하지도 않은지여전히 흙탕물만 콸콸 흘려 보낸다용감하신 울 아버지 칼퀴 들고 들어가 웅덩이 휘저으니고동색 고무신 코 꿰어 나오네. 해님은 중천에 솟아 재미있다 웃어대고학교 가는 내 종종걸음 신바람 난다. 이월순 (시인, 수필가, 1937. 11. - 2021.7.)- 1937년, 충북 보은에서 출생- 2000년, 세기문학 수필부문 신인문학상 수상- 2000년, 동서문학 시부문 맥심상 수상- 2001년, 월간문학세계 아동문학 동시부문 신인문학상 수상- 20..

고깃덩이

이월순 동시집 「바보같은 암소」58페이지 검정 뚝배기에꽁보리밥 두 덩이 물 말아 입에 떠 넣고된장찌개 뚝배기 속을달그락 달그락 긁어본다혹시 고깃덩이 숟가락에 건져질까?아무리 긁어 떠 올려 봐도짜 빠진 된장국물 뿐아침에 그 맛있던 된장 고깃덩이행방이 묘연!계집 찾아 장독엘 갔나?아니 아침에 내가 다 건져먹었나? * 내가 자라날 때 소고기를 먹어 본 기억이 없다.다만 짜 빠진 된장찌개 속의 된장덩이를 숟갈 끝으로 조금씩 잘라 먹으면 지금의 소고기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이월순 (시인, 수필가, 1937. 11. - 2021.7.)- 1937년, 충북 보은에서 출생- 2000년, 세기문학 수필부문 신인문학상 수상- 2000년, 동서문학 시부문 맥심상 수상- 2001년, 월간문학세계 아동문학 동시부문 신..

깜부기 봄 피리

이월순 동시집 「바보같은 암소」38페이지 길가 파란 보리밭봄바람에 술렁일 때못난이 새까만 깜부기함께 술렁인다. 주인에게 들킬세라허리 구부려 슥삭 깡충까투리 기듯 들어간 아이깜부기 몇 폭 뽑아들고깡충 후닥닥 뛰어나온다. 필통 열어 칼 펴들고봄보리 깜부기 피리배 갈라 침 발라 넣고살포시 힘주어 불어보는깜부기 봄 피리 봄보리 깜부기 피리 소리에파란 들녘 아지랑이 숨바꼭질하고술렁이는 파란 보릿대 사이로꾀꼬리 태양빛 춤추고 있다. 이월순 (시인, 수필가, 1937. 11. - 2021.7.)- 1937년, 충북 보은에서 출생- 2000년, 세기문학 수필부문 신인문학상 수상- 2000년, 동서문학 시부문 맥심상 수상- 2001년, 월간문학세계 아동문학 동시부문 신인문학상 수상- 2012년, 장폴 샤를 에이마..

두 이야기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실의 일상은 때로 재미를 더한다. 몸은 아프지만, 입원환자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잠시나마 몸의 아픔과 근심·걱정을 잊어버리고 이야기 속에 푹 빠져버리기도 한다. 남녀노소를 떠나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기에 좁은 병실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지루한 병실 생활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며 하루가 쉬 지나간다. 오래전, 몸이 아파서 한 달을 병원에 입원해 있던 적이 있었는데 병실에서 이루어지는 하루하루는 바깥세상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이었다. 하루는 새벽녘에 소변을 보러 잠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온 후 다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건너편 옆 병상에서 시냇물 흐르듯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아 저거구나’..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몇 년 전의 일이다.대학 기숙사에 기거하는 아들에게서 카톡이 왔다. 병상에 누워 주사를 맞고 있는 한 장의 사진과 함께 영양실조와 과로로 교내에 있는 대학병원에 실려 왔다는 뜬금없는 내용이었다. 순간 지금이 중간고사 기간인지라 공부에 신경 쓰느라 너무 지쳐 입원까지 했나 하는 생각에 한편으로 미안한 마음과 짠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나도 대학 생활을 하던 시절, 평상시에는 공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다가 시험 때가 되면 애면글면 밤을 새워 벼락치기 공부를 하면서 몸 고생 마음고생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공부이며 졸업을 하고 직장을 잡으면 다시는 공부하는 일은 없다.’라고 다짐을 했었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 보니 새로운 학문을 배워야만 하는 필요성을 느낄 때가..

자판 두드리는 소리

오늘도 어김없이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방안에 가득하다. 젊은이들처럼 소낙비가 쏟아지듯 날렵하고 빠른 속도로 일정하고 힘 있게 두드리는 소리도 아니고, 봄비가 내리듯 소리 없이 조용조용 하지도 않다. “툭~툭~~ 턱~턱~” 들려오는 소리의 간격은 불규칙하고 소리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듯 하다가도 잠시 후 그 고요한 적막을 깨고 둔탁하게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또 들린다, 때론 크게, 때론 작게 귓전에서 항상 들리는 익숙한 소리다. 어머니께서 굼뜨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다. 그 소리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들려온다. 팔순을 훌쩍 넘긴 어머니는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도 자다가 일어나 거실을 왔다 갔다 하다가 컴퓨터 앞에 조용히 앉아 자판을 두드린다. 시상이 떠오..

가련한 말티즈

오래전, 홀로 처가에 다녀왔다.매주 주말이면 아내와 함께 혼자 사시는 장모님을 뵙기 위해 처가를 방문하곤 했다. 오늘 방문은 다섯 마리의 새끼를 낳은 하얀색 말티즈를 보기 위해서다. 주인 없는 빈집에서 혼자 새끼들을 돌보고 있기 때문이다.   장모님께서는 처남댁에 일이 있어 오랫동안 집을 비우셨다. 앞집에 사시는 할머니께 먹이 주는 것을 잘 부탁하고 가셨다고 하지만 젖먹이 말티즈가 잘 있는지 몹시 궁금하고 걱정이 되었다. 이 말티즈는 집에서 딸이 키우던 것인데 오래전부터 키워 왔던 고양이와 함께 키우자니 힘에 부쳐 시골에 계시는 장모님께 키우도록 부탁했었다.   장모님은 워낙 정이 많으신 분이지만 천식 때문에 집 안에서는 키우지 못하고 현관문 밖에 집을 지어 온갖 정성과 사랑을 다해 키우셨다. 홀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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