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세상/바람 따라서

킬링필드와 뚤슬랭 감옥

킹스텔라 2011. 6. 6.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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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열한 햇볕이 내리쬐며 35도를 오르내리는 무척이나 더운 날이다.

캄보디아 방문 둘째 날, 프놈펜 330거리 19-21번지에 있는 한아봉사회가 세운 프놈펜 기독교연합봉사관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맞은편에 있는 뚤슬랭 감옥 박물관을 방문했다.

 

 

 

(프놈펜 기독교연합봉사관)

 

 

(프놈펜 기독교연합봉사관 옥상에서 바라본 뚤슬랭 감옥)

 

 

(프놈펜 기독교연합봉사관 옥상에서 바라본 뚤슬랭 감옥)

 

 

(뚤슬랭 감옥의 한 수감동)

 

  우리나라도 과거의아픈 역사가 있지만 캄보디아도 아픈 역사가 있다.

30여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벽돌로 쌓은 담장위에는 지금도 철조망이 둘러처져 있어 오래전의 숨 막힌 공포의 현장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 답답함이 밀려온다.

 

 

 

(담벽에 철조망이 둘러진 뚤슬랭 감옥 외벽)

 

 

  이 뚤슬랭 감옥은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Khmer Rouge) 폴 포트 정권에 의해 수많은 지식인과 양민들이 감금당하고 고문에 못이여 숨져간 곳이다. 우리나라와 비교한다면 일제 강점기에 수많은 애국지사와 죄 없는 백성들이 고문당하고 숨져간 서대문 형무소 같다고나 할까.

그 당시에 고문당하고 죽어간 많은 사람들의 고통스런 현장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뚤슬랭 감옥내의 묘역)

 

  고문의 흔적과 고문의 도구들, 무고한 생명들이 갇혀 있던 감방들, 그리고 실제로 죽어간 많은 사람들의 두개골이 보관되어 있고 당시의 고통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것 같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곳에 수용되었던 1만 4천여 명의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이 단 일곱 명뿐 이라고 한다.

 

 

 

(뚤슬랭 감옥의 고문틀과 고문 도구들)

 

 

(뚤슬랭 감옥의 고문 도구들)

 

 

(뚤슬랭 감옥의 고문 도구틀)

 

 

(뚤슬랭 감옥의 고문 도구틀)

 

 

 (고문으로 죽어간 사람들)

 

 

  (고문으로 죽어간 사람들)

 

 

 (뚤슬랭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

 

 

 (뚤슬랭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

 

 

 (뚤슬랭 감옥에서 고문당해 숨진 주검들)

 

 

 (고문 당하는 모습)

 

 

  (고문 당하는 모습)

 

 

  (고문 당하는 모습)

 

 

  (고문 당하는 모습)

 

 

  (고문 당하는 모습)

 

 

  (고문 당하는 모습)

 

 

  (고문 당하는 모습)

 

 

  (고문 당하는 모습)

 

 

  (고문 당하는 모습)

 

 

  (고문 당하는 모습)

 

 

  (어린 아기를 빼앗기고 고문 당하는 모습)

 

 

 (학살당한 주검들의 두개골)

 

 

 (학살당한 주검들의 두개골)

 

 

 (학살당한 주검들의 두개골)

 

 

 

 

뚤슬랭 감옥을 이곳저곳 관람하고 이곳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집단 학살의 현장인 킬링필드(

툴 에크)로 향했다. 프놈펜 외곽에 자리한 이곳은 프놈펜 근교와 뚤슬랭 감옥에서 죄없는 양민들과 지식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하여 암매장한 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해 묻혀있는 현장이다. 이곳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하늘에서는 약간의 가랑비가 내리며 무더위를 약간 식혀준다.

 

 

 

(킬링필드 현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킬링필드는 1975년에서 1979년 사이 민주 캄푸차 시기에 캄보디아의 군벌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Khmer Rouge)라는 무장 공산주의 단체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을 말한다. 원리주의적 공산주의 단체인 크메르 루즈는 3년 7개월간 전체인구 800만 명 중 4/1인 200만 명에 가까운 국민들을 학살하여 캄보디아 역사중 가장 슬픈 역사로 남아있다.  

 

  1984년 데이비드 퍼트넘이 제작하였으며 롤랑조페(Roland Joffe)가 감독한 킹릴필드(The Killing Fields)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다.

  뉴욕타임스 특파원인 시드니는 현지 통역관인 캄보디아인 디스 프란과 함께 어렵게 현지에서 참혹한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수도 프놈펜이 함락된 이후 시드니는 프랑스 대사관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프란은 캄보디아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프란은 크메르루즈군에 붙잡히고 각고의 노력으로 탈출을 하여 킬링필드를 지나 타이의 난민촌으로 탈출한다. 반면 본국으로 무사히 돌아간 시드니는 프란의 가족을 보살피면서 프란을 구해보려 노력하던 중 프란과 1979년 10월 9일 극적으로 재회한다.

 

 

 

  이 영화는 1980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시드니 션버그 기자의 글, 「디스 프란의 생과 사 : 한 캄보디아인의 이야기」를 각색한 작품으로 캄보디아 내란을 취재하던 미국인 기자와 현지인의 우정을 감동적으로 표현했다. 또한 1975년 정권장악에 성공한 크메르 루즈가 4년간의 통치기간 동안 저지른 극도의 비인간적인 야만과 실상을 전 세계에 알렸다.

 

  수만 명의 양민이 크메르 루즈군에 의해 학살되어 묻힌 장소이지만 지금은 공원처럼 깨끗하게 조성되어있다.

킬링필드 중앙에는 발견된 희생자들의 두개골이 안치된 거대한 5층짜리 위령탑이 서있다. 마치 폭탄을 맞은 것처럼 움푹 들어간 웅덩이에는 군데군데 파란 잔디가 돋아있는 곳도 있고, 물이 고여 있는 구덩이도 있다. 구덩이 앞에 쓰인 안내문은 그때 당시 참담했던 순간을 설명한다. 발굴당시 구덩이 마다 수백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한다.

 

 

 

 

(킬링필드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두개골이 안치된 5층의 위령탑)

 

 

(위령탑에 안치된 희생자들의 두개골)

 

 

(위령탑에 안치된 희생자들의 두개골)

 

 

(킬링필드에서 발견된 희생자들의 옷가지들)

 

 

(킬링필드지역의 희생자를 묻었던 암매장 웅덩이들)

 

 

(어린 아기를 나무에 내리쳐 살해한 현장)

 

 

(희생자들의 유골)

 

 

(희행자들을 기리는 킬링필드내의 박물관)

 

 

(학살의 주범 중 한 사람,'킬링필드'로 알려진 캄보디아 대학살의 주범인 카잉 구엑 에아브, 2010년 재판에서 징역 35년 형이 선고)

 

 

(킬링필드의 암매장 현장을 표현한 그림)

 

 

(킬링필드로 끌려가는 희생자들)

 

  이곳을 둘러보면서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 참담한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았을 터이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한 한 맺힌 그 현장에 이름없는 수많은 해골과 뼈들을 보면서 지금은 살아있는 자들의 관광지가 된 것이 아이러니한 생각이 든다.

 

  캄보디아는 그 옛날 9-15세기 앙코르 왕조의 전성시대는 전설처럼 잊혀지고 프랑스의 식민지와 킬링필드 당시의 수많은 지식인들과 양민들의 학살로 인하여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로 전락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후기

‘킬링 필드’ 참상 알린 전 NYT 기자 타계

  

김상범 기자 ksb1231@kyunghyang.com

ㆍ퓰리처상 수상 시드니 섄버그

 

  1970년대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 참상을 세계에 알린 전 뉴욕타임스 기자 시드니 섄버그가 2016. 7. 9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 향년 82세.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섄버그는 지난 5일 심장마비로 쓰러진 뒤 회복하지 못하고 뉴욕주 포킵시의 한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1959년 뉴욕타임스에 입사한 섄버그는 1970년대 동남아시아 특파원으로 일하며 방글라데시 독립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을 취재했다.

섄버그는 캄보디아 크메르루주(붉은 크메르) 정권의 대량 학살인 ‘킬링 필드’를 보도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공산주의 무장단체 크메르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는 1975년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면서 약화된 친미성향의 론 놀 정권을 몰아내고 캄보디아를 장악했다. 그는 “농민들의 천국”을 구현한다며 도시인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화폐와 사유재산을 폐지했다. 이 과정에서 친미정권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지식인, 정치인 등은 물론이고 노동자와 농민 등 인구의 4분의1에 해당하는 200만명을 학살했다.

섄버그는 론 놀 정권이 전복된 뒤에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캄보디아에 남아 현지 기자이자 통역이었던 디스 프란과 함께 폴 포트의 만행을 보도했다.

섄버그는 후일 “많은 캄보디아 친구들이 프놈펜에서 쫓겨났고 다시는 그들을 보지 못했다. 그들을 보호할 수 없었던 나는 배신자가 된 기분이었고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섄버그는 태국으로 추방된 뒤 미국으로 돌아왔다. 1976년 캄보디아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프란은 군부에 잡혀 4년 동안 고문과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1979년 태국으로 탈출했다. 그는 탈출과정에서 목도한 학살의 참상을 두고 ‘킬링 필드’라는 표현을 처음 쓴 인물이다. 섄버그는 프란과 그의 가족을 뉴욕으로 이주시킨 뒤 프란이 뉴욕타임스 사진기자로 일할 수 있게 도왔다. 섄버그는 캄보디아 내전의 참상을 1980년 <디스 프란의 생과 사>라는 책으로 펴냈다. 프란의 얘기를 담은 이 책은 1984년 롤랑 조페 감독의 <킬링 필드>로 영화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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