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세상/나의 글쓰기

자판 두드리는 소리

킹스텔라 2024. 7. 1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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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어김없이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방안에 가득하다. 젊은이들처럼 소낙비가 쏟아지듯 날렵하고 빠른 속도로 일정하고 힘 있게 두드리는 소리도 아니고, 봄비가 내리듯 소리 없이 조용조용 하지도 않다.

  “~~~ ~~” 들려오는 소리의 간격은 불규칙하고 소리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듯 하다가도 잠시 후 그 고요한 적막을 깨고 둔탁하게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또 들린다, 때론 크게, 때론 작게 귓전에서 항상 들리는 익숙한 소리다. 어머니께서 굼뜨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다.

 

  그 소리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들려온다. 팔순을 훌쩍 넘긴 어머니는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도 자다가 일어나 거실을 왔다 갔다 하다가 컴퓨터 앞에 조용히 앉아 자판을 두드린다. 시상이 떠오르거나 좋은 소재가 생각날 때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식지 않는 대단한 열정이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서…….

 

  어머니는 힘들고 고달픈 외로운 중년을 보내셨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몸이 연약했던 어린 시절, 친정어머니의 세심한 보호와 사랑 속에서 행복한 유년을 보냈었다. 하지만 스물네 살 되던 해에 친정어머니의 권유로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남자에게 시집와 오 남매를 키우며 여자로서의 아픈 시절을 보냈다. 무뚝뚝하면서 권위적이고 뒤늦게 대학을 다니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면서 아이들을 키워야 했다.

 

  어렵고 힘든 경제적 여건, 뒤늦게 겪은 투병의 아픔 등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홀로 감내해야만 했다. 성직자의 아내로서 오 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면서 남편을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으로 성공시켰지만 긴 인생 속에서 정작 본인은 없었다. 자식들을 다 키우고 나니 우울증에 걸릴 만큼 인생이 허무해졌다.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던 가슴 속의 응어리를 글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글쓰기는 한풀이요, 황혼에 찾은 행복이며, 가슴이 뻥 뚫리는 게 어찌나 시원한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고 했다.

 

초창기에 지은 허무라는 시에는 이러한 심정이 잘 담겨 있다.

 

오늘도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그이도 학교 가고

아이들도 학교 가고

 

내일도 또한 그런 것들

지치고 쇠약한 몸과 마음

나의 기쁨은 어디에

나의 행복은 어디에

 

손은 부지런히 빨래를 비비는데

텅 빈 허전한 가슴은 눈물 공장인가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는 어머니께서 회갑을 맞이하던 해부터 시작되어 이십 오 년째 쉬지 않고 두드린다. 놀랍고 반갑기도 하지만 참으로 신기하다. 젊은이들조차도 컴퓨터와 인터넷을 지금처럼 사용하지 않던 오래전 일이다. 딸과 같은 나이의 컴퓨터 강사에게 수많은 질문을 반복하면서 이런저런 눈치를 살피며 늦깎이에 컴퓨터를 배우셨다.

 

  어머니는 특유의 꼼꼼한 기억력으로 팔십 평생의 지난 과거를 시와 수필이라는 형식을 빌려 표현하며 기록했다. 행복했던 유년을 써 내려갔고, 결혼과 신혼 생활을 통해 겪게 되는 여자로서의 아픔과 고독을 풀어냈다. 우울증에 빠져 고통받던 40, 50대와 그것을 힘들게 극복해 가는 과정을 표현했고, 60대 이후 노년의 세세한 일상들을 차례차례 써 내려갔다. 특히 우리의 옛 어머니들만이 겪었던 일부다처제의 가정환경과 어린 나이에 겪은 동생의 죽음, 얼굴도 모르는 남편과의 결혼, 권위적인 남편과 목사의 아내로서 겪는 말 못 할 어려움과 철없는 아이들 곁에서 겪게 되는 소외감을 표현했다. 육순을 넘어서면서는 노년의 힘든 손자 보기, 딸을 외국으로 시집보내는 어머니의 애절한 그리움, 그리고 오래전 뇌경색으로 인한 투병을 통해 겪는 여러 경험을 표현했다.

 

  어머니께서는 지금도 불편한 손과 팔다리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하루도 글쓰기를 쉬어 본 적이 없다. 이러한 글은 씨실과 날실로 엮어져 한 벌의 옷이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이 모질고도 모진 옷을 입으시고 지금은 편안하게 웃으신다. 오늘도 거실 한쪽 컴퓨터 앞에 앉아 마비되었다 풀린 불편한 손으로 더듬더듬 자판을 두드린다. 온 정성과 힘을 다해…….

 

  감사하게도 어머니께서는 이십여 년 전에 시, 동시, 수필 등 3개 부문의 신인 문학상에 각각 당선되어 등단 작가가 되었다. 지금까지 이천여 편의 글, 일곱 권의 시집과 동시집, 수필집을 출간했다. 또한, 여러 문학 단체와 인터넷 문학회에서 많은 글 친구들과 교류하며 뒤늦게 찾은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

 

  어떤 새도 날개를 펴지 않고는 날 수 없듯이 사람도 자기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으며 행복해질 수 없다고 한다. 내가 나를 묶어 놓고 있으면 영영 행복해질 수 없고, 날개가 있어도 창공으로 훨훨 오를 수 없다. 어머니께서는 노년에 이 간단한 진리를 스스로 터득하여 평안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지금도 자판을 두드리고 계신다.

 

 

* 어머니께서는 일곱 번째 저서인 '여든네 번째 봄'이라는 시집을 내시고 이듬해 여든다섯 번째 봄을 보내시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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